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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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018년11월24일 조회1,13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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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누가복음에 감사하는 신앙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를 지나가실 때 열 명의
나병환자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고
그들은 가는 도중에 병이 나은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열 명 중의
아홉 명은 다 집으로 가버리고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했다. 이에 예수님께서 “열 명이 고침 받았는데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에 있느냐”고 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지만 하나님께 돌아와서 감사하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이 현실이다. 이 아홉 명은 불치병을 고침 받는
큰 은혜를 입고도 왜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하지 않았을까?
찰스 브라운은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았던 아홉 명의 심리를
재미있게 추리했다.
첫 번째 사람은 병이 진짜 나은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느라
감사하지 못했고,
두 번째 사람은 병이 낫긴 했지만 재발할지 모르니까 감사하지 못했고,
세 번째 사람은 더러운 옷도 갈아입고 목욕도 깨끗이 하고 예물도
준비해서 천천히 찾아뵈려고 감사하지 못했고,
네 번째 사람은 ‘이제 보니 나병이 아니었던 것 같아’
오진이었다는 생각에 감사하지 못했고,
다섯 번째 사람은 '약간 나은 정도야, 겉에 있는 부스럼은 떨어져도
속에는 아직 병이 남아있을지 몰라’라는 생각에 감사하지 못했다.
여섯 번째 사람은 일단 제사장에게 뛰어가서 자기의 몸을 보이고
다 나았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받은 후에 마음대로
거리를 활보하며 돌아다니느라 감사하지 못했고,
일곱 번째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 특별히 애쓰신 것도 별로 없어.
약을 발라주신 것도 아니니까’라고 생각해서 감사하지 못했고,
여덟 번째 사람은 ‘이런 것은 의사나 랍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뭐’라고 생각해서 감사하지 못했고,
아홉 번째 사람은 ‘사실 나는 이미 회복되고 있었다고.’나을 때가
되어 저절로 나았다고 생각해서 감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936년에 세상을 떠난 루디야드 키플링은 ‘정글북’ 등의 작품을 남긴
영국의 소설가이자 동화작가이다. 1907년에 영어권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해서 유명해졌다. 하루는 기자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수입을 계산해보니까
선생님은 단어 하나로 100불을 벌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사용한
단어 하나의 가치가 100불이나 된다는 이야기죠. 제가 지금 100불을
드릴 테니 저에게 100불의 가치가 있는 말을 한 마디만 해주십시오.”
그러면서 100불짜리 지폐를 꺼내서 주었다. 키플링은 그 돈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으면서 이렇게 한 마디 했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지만 이 한 마디의 가치는
참으로 엄청난 것이다. 어찌 100불의 가치만 되겠는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한 마디만 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과
은혜를 주시는데 말이다. “감사합니다” 한 마디만 하면 인간관계가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감사합니다”
그 한 마디에 왜 그렇게 인색할까? “감사합니다” 그 한 마디를
하기가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께 돌아와 입술로 고백하고 몸으로 감사해야 한다.
“고백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고백되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고백되지 않은 감사는 감사가 아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을 때 “감사합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최고의 보답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 놀랍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오늘 입을 열어 하나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고백해보자.
“감사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 시편 50편 23절 -
< 이 희 수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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